

담양 문화파인더
지난해 12월 4일, 전남문화재단의 주관으로 전남 4개 기초문화재단(담양·순천·화순·나주)의 실무자 총 15명이 일본 간사이 지역으로 향했다. 「2025 행복전남 문화지소-간사이 필드 랩」은 단순한 국외 연수를 넘어, 지역의 문제를 발굴하고 문화적 해법을 모색하는 실무자들의 역량을 극대화하기 위해 기획된 현장 중심 실험실(LAB)이다. 담양군문화재단에서는 실무자 총 3명이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일본 간사이(오사카·교토) 지역의 사례를 경험했다.
우리가 방문한 일본 간사이 지역은 오사카, 교토를 비롯한 거대 도시가 모인 곳으로 인구가 약 2,000만 명에 달함에도 불구하고 한국보다 앞서 지방소멸과 인구유출이라는 위기를 겪으며 선제 대응책을 치열하게 고민해온 곳이다. 담양군문화재단 실무자들은 단순한 견학자가 아닌 ‘능동적 연구자’의 자세로 현장에 뛰어들어 이곳의 다양한 사례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했다. 현장 전문가의 긴밀한 협조로 오사카·교토에서 활동하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었으며, 그들의 사업 현장을 연구실로 삼아 인구 감소와 지방소멸 같은 거대한 담론에 관한 현장의 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이처럼 문화가 어떤 ‘현장기반의 해법’을 제시할 수 있을지 고민했던 여정 중, 인상 깊었던 사례에 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이쿠노 파크_학교 수영장을 레스토랑으로 (출처 : 담양군문화재단 촬영)
오사카 이쿠노구에 위치한 「이쿠노 파크」는 이번 워크숍에서 ‘공간의 재정의’라는 화두를 가장 강렬하게 던져준 장소였다. 이곳은 학생 수 감소로 2021년 폐교된 옛 미유키모리 초등학교를 재생한 곳이다. 하지만 이곳을 단순히 폐교를 리모델링한 복합문화공간이라고 설명하기엔 아쉬움이 남는다. 「이쿠노 파크」는 지역이 안고 있는 사회적 문제를 문화와 연대로 풀어가는 사회 실험실에 가까웠다.
「이쿠노 파크」가 있는 이쿠노구는 오사카시에서 외국인 주민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으로 한국, 베트남, 네팔 등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다.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장소인 만큼 언어, 가치관, 생활양식 등의 문화적 갈등 문제를 피할 수가 없었는데 「이쿠노 파크」는 이 ‘다양성’을 갈등의 원인이 아닌 지역의 ‘자산’으로 삼아 지역에 숨결을 불어넣고 있었다.
평범한 교실을 레스토랑, K-Pop 댄스 아카데미, 세미나실 등 상업공간으로 활용하기도 하고 지역민 대상 다문화 프로그램을 운영해 자연스럽게 교류할 수 있도록 했다. 학교 운동장 역시 주민들을 위해 일부는 개방하여 놀이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고 남은 공간은 유료 주차공간으로 조성해 수익을 창출한다. 이처럼 공공성과 상업성을 띠고 있는 「이쿠노 파크」에서는 언어나 문화의 장벽 때문에 지역사회에 섞이지 못했던 이주민들이 자연스럽게 이웃과 마주하게 된다. 다름을 틀림이 아닌 풍요로움으로 변모시키는 기획의 힘을 목격할 수 있었다.

이쿠노 파크_건물 내 도서관 (출처 : 담양군문화재단 촬영)
「이쿠노 파크」의 차별화된 운영 방식은 장소의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것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지자체가 주도하는 일반적인 공공시설과 달리 민간 기업(RETOWN)과 NPO 단체가 오사카시로부터 위탁받아 관리 운영하여 창의적이고 유연한 시도들이 이뤄지고 있었다. 「이쿠노 파크」의 사례를 통해 공공공간에 민간의 자본과 시민들의 자발성이 만났을 때 공간이 얼마나 역동적으로 변할 수 있는지 볼 수 있다. 「이쿠노 파크」에서 본 것은 잘 고쳐진 건물이 아니라, 지역의 문제를 자산으로 보고 이들이 스스로 주인이 되어 공간을 채워가는 자발성이었다. 공간을 운영하기 위해서 예산의 확보와 더불어 지역 주민의 참여 의지와 태도가 중요하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낡은 교실 바닥에 스며든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지역사회의 새로운 희망으로 이어가는 작업, 그것이 우리가 담양에서 이어나가야 할 현장기반의 해법일 수 있다.
오사카 난바역에서 기차를 타고 내린 후 산으로 올라가는 케이블카(트램)를 타면 와카야마현의 고야산(Koyasan)에 도달할 수 있다. 1,200년의 세월을 품은 고야산은 불교 문화의 중심지로 이와 관련된 역사 문화재들을 접할 수 있다. 그런데 이번 간사이 필드 랩 워크숍에서 발견한 고야산의 유산은 과거의 이야기를 간직한 문화재가 아닌, 그곳의 미래를 지켜낼 사람을 키우는 기획의 힘이었다. 현재 일본의 여느 소도시들처럼 고야산 역시 젊은 세대의 인구유출이라는 숙제를 안고 있다. 지역의 미래를 이끌어갈 인재를 어떻게 육성할 것인가라는 화두 아래, 와카야마현 출신의 연구자 우라이 박사는 고야산 배후마을에 사는 중학교 학생들과 함께 4년여에 걸쳐 「고향 학습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고향 학습 프로젝트」는 우라이 박사의 정교한 설계 속 타카노야마 중학교 학생들이 참여하여 4년 동안 지역의 문제를 마주하고, 경험하며, 해결책을 제안해보는 고향 알아가기 프로젝트이다. 「고향 학습 프로젝트」를 통해 관찰자였던 학생들은 지역 인재로서 역량을 갖춰나가고 고야산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해 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학생들은 학생들은 마을을 직접 둘러보며 개선점을 찾아보고 도시 경관, 불편한 점 등을 자유롭고 창의적으로 그려본다. 이렇게 그려진 생각들은 시청과 마을 주민들을 만나 하나의 미래 사업으로 구체화하여 실제 제안서로 제출되기도 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프로젝트의 결과물보다 만들어지는 과정이 학생들을 대상으로 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정교하다는 점이다. 흔히 공공 프로젝트는 현실 실현을 기반으로 확실한 결과물에 집착하기 쉽지만, 이 프로젝트는 아이들이 마을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그 자체에 집중했다.
결국 이 프로젝트의 목표는 단순한 사업 제안이 아니라, 미래 세대가 고야산에 대해 알아가고 애착을 형성하며 지역의 미래를 이끌 주체로 성장하는 데 있다. 아이들은 인터뷰를 위해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기록하며, 자신들이 발 딛고 선 땅이 얼마나 단단한 역사 위에 서 있는지 몸소 깨닫게 된다. 이러한 과정 중심 기획이야말로 주민과 청소년의 주체성을 깨우는 가장 강한 동력이 된다. 지역 소멸의 위기 앞에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누가 이 마을을 지킬 것인가?”일지 모른다. 고야산은 그 해답을 미래 세대와의 연결에서 찾았다. 「고향 학습 프로젝트」는 단순한 학교 수업이 아니라, 아이들의 무의식 속에 지역의 가치를 각인시키는 정교한 지역 전략이다.
고향에 대한 애착은 주입식 교육으로 생기지 않는다. 자신이 제안한 아이디어가 마을의 정책에 반영되거나, 직접 쓴 글이 지역의 기록이 되는 경험을 통해 아이들은 자기 효능감을 맛본다. 이 사소해 보이는 성취의 기억은 훗날 아이들이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거나, 어디에 있든 고향을 지지하게 만드는 심리적 저지선, 즉 ‘마음의 닻’이 된다. 이 프로젝트가 실질적인 변화를 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기획자의 유연한 태도와 학교 측의 열린 협조가 맞물린 덕분이다. 사실 행정과 교육이라는 서로 다른 두 조직이 공동의 목표를 위해 손을 잡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고야산의 사례는 지역을 살리는 것은 결국 사람이라는 본질적인 공감대가 형성될 때 각 기관이 협력과 연대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고야산의 청소년들이 경험한 지역적 자산을 천천히 알아감에, 우리 전남의 기획자들 역시 지역의 자산이 미래 세대의 일상 속에 스며들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야 함을 깨닫는다. 시대를 연결하는 것은 기술이나 자본이 아니라,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뜨거운 연결이기 때문이다. 반짝이는 행사보다 지속적인 관계를, 화려한 결과물보다 사람을 남기는 기획. 고야산의 아이들과 우라이 박사가 함께 걷는 그 길은 우리가 담양과 전남의 문화 현장에서 이어나가야 할 현장기반의 해법에 대한 답이 되어주었다.

고야산 고향 학습 프로젝트를 설명하고 있는 우라이 박사 (출처 : 담양군문화재단 촬영)
간사이 필드 랩에서 마주한 사례들은 하나의 공통된 질문으로 수렴된다. 문화기획은 무엇을 남겨야 하느냐는 물음이다. 이쿠노 파크와 고야산 사례에서 확인한 해법은 명확했다. 잘 지어진 건물이나 눈에 띄는 성과물이 아니라, 사람이 머물고 다시 연결되는 구조를 남기는 것이 진정한 성과라는 점이다. 하나는 공간을 통해 이웃이 만나도록 만들었고, 다른 하나는 시간을 들여 미래 세대가 지역의 주체로 성장하도록 설계했다. 방식은 달랐지만, 두 사례 모두 결과보다 과정을, 단발성 사업보다 지속 가능한 관계를 중심에 두고 있었다.
이 경험은 담양을 넘어 전남의 문화 현장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지역 소멸에 대응하는 문화기획은 더 많은 행사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지역의 문제를 자산으로 전환하고 주민과 청소년이 스스로 주인이 되도록 판을 짜는 일이어야 한다. 행정의 효율성과 사업 성과를 넘어 참여자의 태도 변화와 관계의 축적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가 기획자의 핵심 역량이 된다. 결국, 지역을 지탱하는 힘은 예산이나 제도가 아니라 그 안에서 형성된 신뢰와 애착이다.
간사이 필드 랩이 남긴 가장 큰 수확은 벤치마킹할 모델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질문을 던지며 기획해야 하는가에 대한 기준이다. 반짝이는 결과물보다 사람을 남기는 기획, 속도보다 밀도를 선택하는 태도, 그리고 지역의 오늘과 내일을 잇는 관계 중심의 설계. 이 원칙이야말로 담양과 전남의 문화 현장에서 우리가 계속 실험하고 축적해 나가야 할 현장기반 해법의 출발점일 것이다.
이 워크숍에서 이뤄졌던 짧은 실습들이 실무자들의 창의적인 생각이 기반이 되어 전남 안에서 조금씩 더 따뜻하고 풍요롭게 바꿔나가는 시도들이 이뤄지기를 희망한다. 현장에서 변화를 만드는 기획자들의 발걸음이 지역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즐거움으로 이어지길 기대해 본다.

고야산 고향 학습 프로젝트를 설명하고 있는 우라이 박사 (출처 : 담양군문화재단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