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담양 문화파인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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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 창평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여러 음식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상징적인 것은 아마 창평국밥일 것이다. 국물에 밥을 말아 후루룩 먹으면 든든한 한 끼가 되어주는 국밥 한 그릇.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음식이 어쩌다 창평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을까. 창평국밥은 장터가 살아 숨 쉬던 시절, 사람들의 생계와 노동, 농경 생활과 시장 문화 속에서 오랜 시간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온 생활 음식이라고 할 수 있다.
장터를 오가던 사람들의 삶과 노동, 시장의 풍경과 공동체의 시간이 켜켜이 쌓이며 만들어진 오늘의 창평국밥. 그 중심에는 일제강점기 장터의 술국에서 시작해 3대째 같은 자리를 지켜오고 있는 창평원조시장국밥이 있다. 창평장터의 기억과 함께 이어져 온 국밥 한 그릇 속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한다.
창평원조시장국밥의 시작은 1917년생 조지옥 할머니의 장터 음식에서 비롯된다. 일제강점기 후반인 1930년대 후반, 조지옥 할머니는 창평장터에서 막걸리와 술국을 팔며 생계를 이어갔다. 배고픈 시절이었던 만큼 손님들은 술국에 밥을 조금 말아 달라고 부탁했고, 여기에 고기를 몇 점 얹어주며 자연스럽게 지금의 국밥 형태가 만들어졌다. 처음부터 ‘국밥’을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탄생한 음식이 아니라, 장터 사람들의 허기를 달래주던 생활 음식이었던 셈이다.
조지옥 할머니의 뒤를 이어 며느리 전현숙 여사가 가업을 이어받았다. 장성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창평으로 들어온 전현숙 여사는 스물두 살에 결혼하며 시어머니 곁에서 국밥 장사를 배우기 시작했다. 몸이 약했던 남편 대신 연탄 화덕 앞에 서서 국밥을 끓였고, 손님이 늘어나자 연탄에서 가스로 바꾸며 장사를 이어갔다. 당시 창평장터에는 국밥집이 여러 곳 있었지만, 세월 속에 대부분 사라졌고, 오늘날까지 같은 자리에서 90여 년 역사를 이어온 집은 창평원조시장국밥이 유일하다.
현재는 차남 김성현 대표와 아내 나기남 씨가 3대째 가업을 이어가고 있다. 김 대표는 1991년 잠시 어머니 일을 돕기 위해 식당에 들어왔지만, 장터 국밥집 특유의 분주함과 손님들로 가득 찬 풍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식당 운영에 깊이 참여하게 되었다. 이후 조리 환경과 손님 응대 시스템을 하나씩 정비하며 지금의 창평원조시장국밥을 만들어왔다. 3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장터 국밥의 맥을 지켜온 셈이다.
지금의 창평 국밥 거리를 떠올리면 여러 국밥집이 줄지어 있는 풍경이 먼저 떠오르지만, 1970년대의 창평장터는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당시 장터 안에는 7곳 안팎의 국밥집이 있었고, 대부분 간판조차 없이 ‘옥숙이국밥집’, ‘용호엄마국밥집’, ‘경숙이할머니국밥집’처럼 사람 이름으로 불렸다. 장날이면 시장 곳곳에 화덕이 놓였고, 국밥 냄새와 연기가 장터를 가득 메웠다.
특히 대장간 주변에는 늘 국밥집이 함께 자리했다. 농기구를 고치러 온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허기를 달래기 위해 국밥을 찾았기 때문이다. 장터는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공간이 아니라, 쉬고 먹고 사람을 만나는 생활의 중심이었다. 전현숙 여사는 당시 장터를 “소와 돼지, 목화솜까지 거래되던 큰 시장”으로 기억한다.
그 시절 국밥 한 그릇 가격은 30원 남짓이었다. 장에 나온 어머니들에게는 조금 싸게 받고, 남자 손님에게는 조금 더 받던 ‘장밥’ 문화도 있었다. 정량보다는 푸짐한 인심이 중요했던 시대였다. 배고픈 학생들에게 밥을 더 퍼주고, 예비군 훈련을 마친 청년들에게 국밥을 아끼지 않던 풍경은 장터 음식이 단순한 외식이 아니라 공동체의 정서였음을 보여준다. 세월이 흐르며 장터 국밥집들은 하나둘 문을 닫거나 광주로 옮겨갔고, 1990년대 이후 지금과 같은 국밥 거리 형태가 다시 만들어졌다. 하지만 창평원조시장국밥은 처음 시작한 그 자리에서 여전히 장터의 시간을 지키고 있다.

시장의 풍경이 바뀌는 시간 속에서도 같은 자리를 지켜온 창평원조시장국밥의 모습
창평원조시장국밥을 특별하게 만드는 가장 큰 특징은 바로 ‘토렴’이다. 뜨거운 국물을 밥에 여러 번 부었다 따르기를 반복하며 온도를 맞추는 전통 조리 방식이다. 밥알에 국물이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지나치게 뜨겁지 않아 부드럽게 넘어가는 맛이 특징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국밥집은 조리 시간을 줄이기 위해 밥을 한 번에 말아내거나 따로국밥 형태로 내놓지만, 이 집은 지금도 토렴 방식을 고수한다. 손이 많이 가고 숙련이 필요한 방식이지만, 김성현 대표는 “토렴을 해야 국물이 밥에 제대로 스민다”라고 말한다.
국물 역시 맑고 시원한 맛을 유지하는 것이 원칙이다. 전현숙 여사는 “비법은 없다”라고 말하지만, 국물을 맑게 하고, 그날 들여온 고기를 그날 모두 사용하는 원칙만큼은 철저하게 지켜왔다. 하루에 사용하는 돼지만 해도 40~50마리에 달하고, 김치는 연간 6천 포기 가까이 직접 담근다. 재료를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가공식품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태도는 시어머니 세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철학이다.
그래서인지 손님들은 이 집 국밥을 두고 “속이 편하다”,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기름지거나 자극적인 맛이 아니라, 몸이 기억하는 오래된 밥의 감각에 가깝다. 김성현 대표가 창평 국밥을 “보약 같은 밥”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장터의 시간과 손맛이 담긴 창평 모듬국밥 한상.
해마다 직접 담그는 6천 포기의 김치는 맑은 국물과 어우러져 오래 기억되는 맛을 완성한다.
창평원조시장국밥에는 유난히 오래된 단골손님이 많다. 어린 시절 부모 손을 잡고 오던 아이가 어느새 자식을 데리고 다시 찾아오고, 젊은 부부로 함께 오던 손님이 세월이 지나 홀로 국밥을 먹으러 오는 모습도 흔하다. 식당은 그렇게 사람들의 시간을 함께 견디며 살아간다. 전현숙 여사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손님 이야기를 들려준다. 미국 LA에서 일부러 찾아온 손님이 있었는데, 하필 그날 고기가 모두 떨어져 국밥을 내어주지 못했다고 한다. 먼 길을 찾아온 손님에게 한 그릇 대접하지 못한 미안함이 지금까지 마음에 남아 있다고 했다.
1990년대에는 창평고 학생들이 자주 들렀다. “배고파요”라는 말 한마디면 밥을 더 퍼주곤 했고, 돈이 없어도 그냥 먹고 가는 학생들이 많았다. 훗날 어른이 되어 선물을 들고 와 “그때 정말 감사했다”고 인사할 때면, 국밥 한 그릇이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누군가의 기억이 되었음을 실감한다고 한다. 창평원조시장국밥은 그렇게 손님들과 함께 나이를 먹어왔다. 국밥 한 그릇 사이로 지역의 시간이 흐르고, 사람들의 삶이 차곡차곡 쌓여온 공간인 셈이다.

현재 창평원조돼지국밥을 있게 만든 전현숙 대표.
’당일 들어온 고기는 당일 소진하기’와 같은 자신만의 소신과 원칙으로 가게를 운영하는 모습에서 자부심이 엿보인다.
창평원조시장국밥은 처음 시작한 자리에서 단 한 번도 이전하지 않았다. 장터 한쪽 작은 공간에서 멍석을 펴고 국밥을 말아내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같은 자리에서 창평장터의 변화를 지켜봐 왔다. 하지만 최근 장터 풍경은 크게 달라졌다. 시장 화재 이후 새 건물이 들어서면서 식당 입구가 가려졌고, 주차 공간도 줄어들었다. 예전처럼 탁 트인 장터의 분위기는 사라졌고, 처음 오는 외지 손님들은 식당을 찾기 어려워졌다. 전현숙 여사는 “옛날 창평시장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졌다”라고 말한다.
그런데도 가족들은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 이곳은 단순한 영업 공간이 아니라, 장터에서부터 이어온 가족의 삶과 기억이 남아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오래된 방식 그대로 국밥을 끓이고, 토렴을 하고, 손님을 맞이하는 일이야말로 이 집의 역사를 이어가는 방식이라고 믿고 있다. 창평원조시장국밥은 단순히 오래된 식당이 아니다. 장터 음식의 역사와 지역의 생활문화, 세대를 거쳐 이어진 손맛과 공동체의 기억이 함께 남아 있는 살아 있는 문화유산이다. 한 그릇의 국밥 속에는 창평장터의 시간과 사람들의 삶, 그리고 사라져가는 장터 문화의 마지막 온기가 여전히 담겨 있다.
인터뷰ㆍ연구보고서 : ㈜남도다락, 남도학연구소 소장 서해숙
인터뷰 각색 : 담양군문화재단 문화정책팀장 조미라
「담양의 삶과 기억을 담은 음식문화 연구조사」, 담양군문화재단, 2025.12.
글. 조미라 0126cloud@damyangcf.or.kr
사진. 양희상(유토픽쳐스)
담양군문화재단 웹진 「담양 문화파인더」 | Vol. 10 | 2026. 5. 19.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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