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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연풍진 담양: 다시 만난 연인을 그리듯  <br />담양 국가문화유산야행 포스터 그리기
  • 연연풍진 담양: 다시 만난 연인을 그리듯
    담양 국가문화유산야행 포스터 그리기

    담양 문화파인더

밥장 | 작가/일러스트레이터
  • #지금담양
  • #담양국가문화유산야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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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건 생각나지 않는 게 늘어가는 걸지도 몰라.”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 중에서
 긴 터널을 빠져 나오면 슬금슬금 빛이 스며들 듯 내가 다녀온 담양을 떠올리려고 뒤돌아보았습니다. 마치 키보드를 꺼내기 전부터 화면 가득 글이 쏟아지는 기분이랄까요. 아무런 정보 없이 마주쳤던 오래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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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건 생각나지 않는 게 늘어가는 걸지도 몰라.”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 중에서

 긴 터널을 빠져 나오면 슬금슬금 빛이 스며들 듯 내가 다녀온 담양을 떠올리려고 뒤돌아보았습니다. 마치 키보드를 꺼내기 전부터 화면 가득 글이 쏟아지는 기분이랄까요. 아무런 정보 없이 마주쳤던 오래된 정원, 검은 연못을 떠다니는 배롱나무 꽃잎, 달군 숯불을 길다랗게 쌓아 두고 차례로 구워낸 돼지갈비 냄새, 앞으로 나고 자랄 군민들을 위해 나무를 심었다는 긴 제방까지. 함께 왔던 그녀의 이름과 얼굴은 희미해졌지만 명옥헌과 승일식당, 관방제림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눈발이 날리던 지난 1월 담양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가을에 열릴 행사 포스터 그림을 맡기고 싶다고 했습니다. 담당자가 완주에서 열리는 개인전까지 직접 찾아주었습니다. 단순히 돈 받고 그림 그리는 일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습니다. 잊혀지던 담양이 불쑥 다가와 산뜻하게 말을 거는 기분이었습니다.

 이번에 그릴 그림은 담양 국가유산야행 포스터였습니다. 야행은 국가유산청이 우리고장 국가유산을 활용하기 위해 만든 사업입니다. 국가유산을 홍보하기 위해 국가유산 유유자적이라는 브랜드를 만들었습니다. 콘텐츠를 바탕으로 한 오감만족 프로그램인 생생을 비롯하여 향교와 서원, 야행, 전통산사, 고택종가까지 다섯 개 사업으로 이루어집니다. 20년 만에 담양을 다시 찾아와 관방제림을 따라 걸었습니다. 나뭇잎 스치는 소리로 가득한 그늘 아래로 시원한 바람이 불었습니다. 머릿 속 스케치북을 꺼내 이것저것 그려보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풍경을 넘어서는 무언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마음을 들여다 보기라도 한 듯 담당자가 말을 꺼냈습니다.

‘혹시 성 부사를 아세요?’

 성 부사의 본명은 성이성으로 조선시대 목민관이었습니다. 1648년 인조 26년 지금으로 치면 담양군수인 담양부사로 있으면서 처음으로 제방을 쌓고 나무를 심었습니다. 게다가 조선의 로맨스 <춘향전>의 사랑꾼 이몽룡의 실제인물이기도 했습니다. 일도 잘 하고 사랑도 뜨거웠다니. 이때부터 머릿 속이 바빠졌습니다. 그 외에도 조선의 닥터 스트레인지 전우치, 밴드 이름으로 더 알려진 이날치도 담양 사람이었고 모두 실제 인물이었습니다.

‘성 부사와 전우치, 이날치를 그리고 싶어요.’

나도 모르게 툭 튀어 나왔습니다. 조근조근 설명하던 담당자도 갑자기 튀어나온 말에 살짝 당황한 듯 보였습니다.

‘좋아요. 그럼 어떻게 그릴 거예요?’

 이제부터 진짜 제 능력을 선보여야죠. 그동안 갈고 닦은 손 기술을 마음껏 뽐낼 시간입니다. 프로라면 어제 전기 자동차를 그렸어도 오늘은 아무렇지 않게 장원영을 그릴 줄 알아야 합니다. 스타일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어야 먹고삽니다. 한 가지 전술로는 모든 경기에서 결코 이길 수 없는 감독의 운명처럼 말이죠.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려야 할까요? 웹툰에 어울리는 9등신? 판타지 사극에 나올 법한 미남 배우? 아예 사람보다 동물에 가까운 3등신 캐릭터? 고민하다가 사람과 동물, 동물과 인형 그 어디쯤에 있는 무언가로 그려보면 어떨까 싶었습니다. 요즘 이상형을 묘사하는 단어 중에서 ‘모찌상’이나 ‘두부상’이 있습니다. 피부가 맑고 인상이 부드럽고 말랑한 느낌을 떡과 두부에 비유해서 부르는 말입니다.

 작업실로 돌아오자마자 연필을 잡았습니다. 연기처럼 희미하게 떠오르는 ‘두부상’ 성 부사를 놓칠까봐 마음이 급했습니다. 곧바로 그린 덕분에 잘 마무리했습니다. 전우치와 이날치도 어렵지 않게 완성했습니다. 그리고 고려 시대에 세운 오층석탑 옆에 있었다고 전해진 주막을 바탕으로 ‘이야기꾼’ 주모도 상상해서 넣었습니다.

 



담양 두부상 4인조, 첫 선을 보이다. 왼쪽부터 전우치, 성부사, 주모, 이날치 ©밥장

 

 4인방 모두 두부상이라 비슷하게 보였습니다. 캐릭터를 구분하려고 의상과 소품을 더했습니다. 전우치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로 세계적인 ‘핫템’으로 떠오른 갓을 씌웠습니다. 무엇보다 ‘폼’이 중요하니까요. 거기에 도술을 상징하는 환술봉과 부적을 그렸습니다. 성 부사는 관직을 상징하는 ‘사또 모자’ 전립을 씌웠습니다. 흙으로 쌓은 제방이 무너지지 않도록 나무를 심었기에 묘목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했습니다. 이날치는 줄타기를 너무 잘 해서 ‘날치’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춤과 노래는 물론 예능까지 섭렵한 만능 엔터테이너였습니다. 아이돌 메이크업을 한 중성적인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주모는 술 한잔 건네며 ‘혹시 이런 소문 들어봤어’라고 자연스럽게 말을 거는 단골집 바텐터 느낌을 담았습니다. 캐릭터를 설명하는 문장도 덧붙였습니다.

 

 환술사 전우치: 신기한 구경 한번 시켜줄까?

 관방제림 성부사: 내 재산은 달빛 아래 숲일 뿐

 힙광대 이날치: 담양이 들썩이게 놀아볼까나?

 스토리텔러 주모: 재미난 이야기 좀 해줄까?


캐릭터 시안 (위)왼쪽부터 전우치, 성 부사, 이날치, 주모 (아래)캐릭터에 어울리는 소품들

 

 국가유산야행은 2026년 기준으로 전국 55개 지역에서 열립니다. 국가유산야행을 검색하면 다른 지역에서 만든 포스터를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 밤을 배경으로 보름달이 떠 있고 조명으로 반짝거리는 건물들과 그 사이로 지나가는 관객들을 묘사했습니다. 개인적으로 2019년 통영에서 열린 야행 포스터를 그렸습니다. 달밤과 야간조명, 관객은 넣고 싶지 않았습니다. 일부러 새하얀 바탕에 건물 대신 캐릭터를 넣었습니다. 작가가 어디서 본 듯한 그림을 그린다? 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2019년 통영문화재야행 포스터를 위한 일러스트 ©밥장

 

 담양 국가유산야행도 색다른 컨셉으로 그렸는데 흔쾌히 받아주었습니다. 좋은 작품은 실력 있는 일러스트레이터가 만드는 게 아닙니다. 좋은 걸 선택하는 클라이언트의 몫이 훨씬 큽니다. 먼저 작가를 믿고, 실무자들과 충분히 이야기 나누고, 함께 컨셉을 잡고, 조금 낯설지만 뚝심있게 결정해주었습니다. 저로서는 정말 신나게 그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피드백을 받아 좀 더 다듬어서 최종 이미지를 그렸습니다. 흑백과 칼라 버전 두 가지로 그렸는데 제 장점인 ‘펜 선’ 맛을 최대한 끌어냈습니다. 최종 버전에서는 전우치 옆에 구름을 넣어 하늘을 나는 능력을 빗대어 표현했습니다. 성 부사 옆에는 담양군 관광 캐릭터인 대쪽이를, 주모 옆에는 담나귀를 그렸습니다. 청백리였던 성 부사와 대쪽이, 동네 방송국 주모와 담나귀라니 왠지 잘 어울리지 않나요? 칼라 버전에는 캐릭터에 어울린 만한 색을 골랐습니다. 땅과 하늘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전우치는 파랑, 고결한 선비로서 미래의 꿈을 키운 성 부사는 보라와 초록, 흥 부자, 힙광대, 만능 엔터테이너 이날치는 빨강, 그리고 잘 빚은 구수한 막걸리가 떠오르는 주모는 흙빛 노랑을 썼습니다.

 


캐릭터 최종안 왼쪽부터 전우치, 성 부사(feat.대쪽이), 이날치, 주모(feat. 담나귀)

 

마지막으로 포스터 외에 이곳저곳 귀엽게 쓸 만한 아이콘도 개발했습니다. 선을 단순화하여 홍보자료에 넣거나 행사용 소품이나 굿즈를 만들기 편하게끔 그렸습니다. 캐릭터를 대표하는 물건들도 그렸습니다.

 


이곳저곳 쓸 캐릭터 (위)왼쪽부터 전우치, 성 부사, 이날치, 주모 (아래)왼쪽부터 구름과 부적, 묘목, 부채, 술잔

 

 포스터 디자인에 담을 수 있게끔 모든 그림을 디지털 파일로 보냈습니다. 작업비도 깔끔하게 받았습니다. 제가 할 일은 모두 끝났습니다. 작업을 모두 마치고 담양을 다시 찾았습니다. 담당자들과 다시 만나 커피를 홀짝거리며 수다를 떨었습니다. 가을에 열릴 야행 행사에 꼭 찾아뵙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들과 헤어지고 담양 톨게이트를 지나 고속도로에 올랐습니다. 오래된 타이페이 영화 <연연풍진>이 떠올랐습니다. 제목처럼 ‘고단한 세상, 그럼에도 그리워하고 사랑한다’는 말 때문인지 영화 속 고스넉하고 쓸쓸했던 시골 풍경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림 덕분에, 함께 작업한 시간과 만남 덕분에 나의 담양은 더욱 따뜻하고 아련합니다. 부디 담양을 찾는 분들도 저와 같은 경험을 만들면 좋겠습니다. ‘담양 두부상 4인방’이 한 몫을 한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구요.

 

글. 그림. 밥장 jbob70@naver.com

글 쓰고 그림 그리고 여행 다니며 책 읽는 사람.
 그걸로 먹고살 수 있다며 애써 버티는 사람.
 75세를 인생 디데이로 잡고 카운트다운하면서 사는 사람.
 긴 이력과 저서 목록을 부끄러워 하는 사람.

담양군문화재단 웹진 「담양 문화파인더」 | Vol. 16 | ​2026. 8. 14.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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